사회복지영상/사회복지아카이브-역사기록

2006년 7월 25일 1세대탐방 박보희선배님

이감동 2018. 8. 1. 23:19



일시 : 2007725() 오전 10

장소 : 박보희선배님 자택 정원

녹음 : 최수영

녹취 :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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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바깥분이 조재경씨라고 그 양반이 한국에서 군정 때서부터 군정 때 초기 사회복지행정 사회사업시설 행정국장을 하신 분이예요. 하상락 선생님도 그렇고 김학묵 선생님도 그렇고, 그 양반들을 외국에 유학보내는 일을 그 양반이 하셨어. 그래서 그 양반이 아마 어쩌면, 운이 좋으면 12시 전에 돌아오시면은 그 분도 말씀을 좀 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분은 사회사업 졸업자는 아니고 초기 우리나라 아주 해방 후 초기 사회복지행정을 하신 분이죠.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우선들 목들 축이시고, 어떻게 시작을 해야 될지 난 모르겠는데, 그저 완전히 여러분들의 편의에 따라서 나는 반응을 하면 되는 걸로 내가 알고 있습니다. (웃음)

 

양원석 선생님 으흠. 이렇게 좋은 일들 해서 다행이고 여기 앉아계신 다른 분들은 아직 학교에 계신 분들인가요?

 

양원석 : . 학생들이 대부분이구요, 졸업하고 현장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박보희 : 몇몇 분계시고. 학부하고 대학원생은 없고?

 

양원석 : 대학원생은 없습니다.

 

박보희 : 자리가 좀 모자라는가 보지? 모자라면 이 의자를 이 테이블을 연결해 가지고 해도 되는데.

 

 

제 자료가 나와 있는게 별로 없고, 영문으로 된 것들은 꽤 있어요. 그런 것들이라도 필요하면 지금 카피들이 남은 게 별로 없지만, 카피를 카피해서 그거 할 수 있어요. 나중에 필요하면 알려주시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라는 것은 영어로 된 것도, 한국 것도 더러 있지만, 그것은 광의의 사회복지라고 할까 사회개발.

그리고 최근에 와서 1992년인가 출범시킨 한국아동단체협의회. 그것과 관련해서 거기서 그러한 자료를 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동 통계로 본 아동상황 이것을 지금 세 번 시리즈로 냈어요. 한국 것 있고....

 

하여튼 여기 저 첫째가 말이죠. 초창기 사회복지계에서 선배님께서 활동하신 내용에 대하여 여쭙고 싶습니다. 특히 환경, 아동, 경제개발, 여성, 인권 등 각 분야에서의 시대를 앞서.... 하여튼 이런 분야에서 활동하신 것.

 

내가요. 사회사업을 사회사업과에 입학한지가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한지가 1947년이었어요. 그 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사회사업학과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이화대학에서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내가 꼭 얘기하고 싶은 것은 김활란 박사가 그 때 총장이었는데, 이 양반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까, 그렇지만은 양식이 있었다면 누구나 다 짐작을 했을 수도 있는 건데, 2차대전 와중에 이미 미국에 있는 기독교 감리교 선교부하고 접촉을 해가지고 전후에 우리 한국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 얼마나 사회복지를 위한 요구가 크리라는 것 이런 걸 짐작하시고 사회사업학과 설립을 위한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래서 그런 도움을 받아가지고 사회사업학과를 설립하셨는데, 그 전에는 이화여자대학에 영문과, 가사과, 음악과, 아동보육과 이렇게 밖에 없었거든요. 그래 설립을 하셨어요.

 

그런데 나는 처음에... 내가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인데, 내려와 가지고 여기 학제가 변경이 되었는데, 이건 너무 자세한 얘기에 들어갈지 모르겠지만, 초창기 얘기니까, 내가 어떻게 사회복지 입문했는지 조금 설명하는게 괜찮을 것 같은데,

 

내려와 보니까 남쪽에서는 학제가 변경이 되가지고 4년 중학교 제도에서 3년 초급 중학교, 그 다음에 3년 고등학교 이렇게 제도로 변해가지고, 6년을 나와야 대학에 되있더라구요. 그런데 예외가 있었어요. 예외가 뭐였는가 하면 그러니까 모든 중학교 대학교들이 학생들을 받지 못했죠. 47년에는. 예외가 뭐였는가 하면 의과대학 예과하고 수산대학교가 처음으로 그때 부산인가? 부산해양수산대학 부산에 있죠? 처음으로 그 쪽에 그 해에 생겼어요.

 

그러니까 나로서는 갈 수 있는 대라는 곳은 의과대학 예과하고 수산대학교 밖에 없으니까 의과대학 예과에 갔어요. 굉장한 경쟁을 뚫고 어떻게 입학이 됐는데, 들어가보니까 내 성격에 맞는 것 같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그 해에 뒤늦게 이화대학에서 사회사업학과를 만들면서 처음으로 10월에 학생모집을 했어요. 그래서 의과대학 그만두고 그 곳으로 옮겼죠. 이제 아동교육과가 또 생겼는데 아동하고 사회사업하고 둘 중 하나 고를 수 있었는데, 사회가 나한테 조금 더 친근감이 있어가지고, 사회사업이 뭔지 전혀 모르고 사회사업에 입문했다가 50년에 한국사변이 났잖아요.

 

그래가지고 여러 고초 끝에 부산에 가서 일단 낙착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 가서 어떻게 되었냐 하면 내가 취직을 해서 벌어먹어야 되겠는데, 마치 학교 아직도 사변 전에 잠깐 그 땐 보건사회부라 그랬는데, 보건사회부에서 실습을 한 적이 있었는데 여름에, 그 때 처음으로 타이프라이터를 배웠어요. 실습하는 과정에서 뭘 도와주기 위해서.

 

그걸 가지고 이제 취직을 했는데, 미군군사원정처라는 데 가가지고, 그러다가 한 몇 달후에 인정을 받아가지고 국제연합한국민사원조처라는데가 있었거든요. 저기 수영에 헤드쿼터를 가지고 있고 부산시내에는 경상북도인가 남도인가 그 지역 담당사무실도 있고 했는데,

 

국제연합 기구에 내가 행정보좌관으로 갔어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내가 국제연합하고 인연을 맺은 처음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하여튼 거기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은 시내 나가보니까 부랑아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부모를 잃은 애들, 시가지 왔다갔다 하면서 훔치기도 하고 버스에 올라타서 쌀가마니도 끌어다가 달아나기도 하도 나도 다방에 앉았다가 내 가방을 훔쳐가는 것도 봤고,

그런 것을 몇 번 경험하고 나니까, 이 애들이 수가 꽤 되었는데 이 애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나라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이냐, 쟤들 스스로의 앞날도 문제지만은 우리 사회 전체의 앞날도 문제가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로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신통한 것은 없어서 하여튼 크리스마스 전날내가 지독한 기독교인도 아니지만은 그때도 아니었고, 지금도 애매한 기독교인인데 나는, 그때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청 뒤에 애들이 모여서 모닥불을 피우고 자기들끼리 생활한 그런 집단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가서 너희들 중에. 아 근데 이것을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이화여대 아동교육학과를 다니던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그 친구하고 나하고 같이 마음을 먹고 가서 우리들하고 같이 살 생각이 있는 애들이 있느냐 물어봤더니 다섯명이 따라왔어요.

그래서 그것이 전쟁고아들, 부랑아들을 보호하기 시작한 시초예요. 근데 얘들이 오고 난 다음에 점점 애들이 친구를 데리고 왔어요. 여러분들 중에서 부산에서 온 사람 있어요? 거기 범일동 있잖우? 범일동에서 집을 세를 얻어가지고 거기서 살기 시작했는데 처음 다섯쯤에서 시작했다가 열일곱쯤까지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내 친구하고 나하고 우리 직장이 있었으니까 둘의 수입을 가지고 애들 같이 생활하고 쓰고 했는데, 어려워지니까 콩나물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콩나물을 키워서 근처의 한국 부대에다 납품을 하곤 했어요. 내 친구는 늑막염까지 걸리고 했는데...

 

그러다가 내 친구는 정식 고아원으로 만들자 했고,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나는 우리나라에 생기는 부랑아 혹은 소위 요보호아동들이 발생하는 지역에서 책임지고 보호해야 한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어요. 아직 이화대학을 채 졸업하지 못했지만, 졸업은 51년인가 했는데, 동네니 여러군데 다니면서 그러한 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화대학에서 나를 가르친 적이 있는 교수들이 캐나다유니테리안선교부에서 장학금을 타주면서 사회사업 하고 싶으면 캐나다에 가서 정식으로 공부하고 와라 해서 가서 캐나다에 가서 3년 공부하고 석사학위해서 돌아온거예요.

 

그래서 이화대학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전문사회사업 학과를 내가 만들었어요. 그전까지는 사회사업과라고는 있었지만, 그냥 종교계통 교수님들하고, 선교사님하고 가르치고, 사회사업 과목이라는 것은 여기저기 사회사업 시설인 고아원 등을 견학하고 오고, 가끔가다가 경험을 쌓는 실습을 하는 정도였거든요.

 

그것을 완전히 내가 바꿔놨죠. 과목도 완전히 사회사업 전공과목으로 구조를 했고, 실습제도를 처음으로 만들어서 그때 있던 국내 여러 사회사업시설, 사회복지관, 병원 등... 학교는 그 때 시작된 것 같지 않아. 학교는 나중에고, 초창기에는 의료법인 안에서 KCC 등이 있었는데, 그런 데, 캐나다유니테리안봉사회 등에서 실습을 했고, 나중에는 물론 KDI로까지 실습을 넓히기도 했지만, 그 제도를 내가 처음으로 이화대학에서 시작을 했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하상락 선생님, 김학묵씨라든지 보건사회부에 있었거든요. 그 때 우리 바깥양반이 거기 국장으로 계시면서 그 분들을 미국 중부에 있는 미국 Minnesota University사회사업대학에 보내서 백근칠씨하고 세분을 보내서 서울대학교에 사회복지학과가 생긴 거죠.

 

그러니까 그때에는 이화여자대학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고, 그러다가 김덕... 내가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데 하여튼 지금 강남 사회복지대학을 창립하신 분, 그때는 중앙신학대학교 안에 사회사업과를 만들어서 그것을 시작하셨어요. 절간에서 시작하셨고, 나도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또 숭실대학이 나오고, 이렇게 해서 사회복지교육이 확장이 되어서 우리나라 사회사업대학 협의회까지 생겼었어요. 아마 초대 협의회장을 하상락 선생님이 하신 것 같고, 나도 몇 대인가를 했고,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주들 모여서 커리큘럼, 실습지도, 타 전문영역과의 연계 문제 등을 논의하고 세미나 등을 1년에 한번 이상씩 하고 학회도 생기고, 학회에서 논의들을 하면서 이루어짐.

 

그 때 초창기에 문제라는 것은 사회사업에 대한 인식이 자선사업과 동일시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재래적인 시설 위주의 여성이건, 아동이건, 노인이건 그러한 접근 밖에 모르고, 자선사업을 한다는 것은 어떤 독지가가 하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한국사변 당시에 하도 사회요구라는 것이 커지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어요. 그래도 사실 정부의 능력은 자체적으로 없었음. 외원에 의지하여 돌보고 구호하는 구호사업이 중심이었고, 그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인 외국민간원조단체 KAVA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었어요. 아마 그 사람들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심각한 모자, 노인, 기아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을 거예요.

그것으로 인하여 공이 사회복지 요구문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개념이 입력이 되기 시작했지요. 그렇지만 내가 그 때 60년대 초 이승만 정권이 물러간 후에 조금 지나서 군사정권이 일어났잖아요? 3공화국 생긴 무렵에 일단 조금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해서 나갔었어요.

 

그때 까지만 해도 한국 내에서 전문사회사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행정, 정책 하는 사람들인 누구든 몰랐어요. 너무나 답답했었어요. 내가 강의하는 가운데, 아동보호, 노인보호 등 과 관련하여 시설보호가 아닌 대체적인 방안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수강생 중 한명의 부모가 시설 운영자가 있었는데, 시설연합에서 항의가 들어와서 나를 내쫗겠다고 하기도 해서, 그때 나는 굉장히 답답한 시기를 거쳤어요.

 

미국가서 사회사업을 계속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사회철학을 콜럼비아 대학에서 하려 했는데, 가서 보니까 내 배경이 철학과 관련이 없는 것이어서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1학기 심리학, 사회철학 강의를 몇 개 듣고 나서 일단 미국에서 경험을 쌓았어요.

 

미국에서는 사회사업 전문 학위를 하려면 현장경험이 5년쯤 있어야 합니다. 당장 학부졸업하고 박사학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석사학위는 있었는데도 이내 박사학위 바로 갈 수 없었어요. 현장경험도 해야 하고...

 

사회복지는 응용과학이지, 순수과학이 아니거든요. 순수사회과학은 사회학, 경제학 등이 할 것이지만, 사회복지학은 응용이예요. 그러므로 실제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지, 그러한 아이디어를 키우고, 실천력을 키우고 하는 것이 사회복지의 사명이예요.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그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다시 말해 5년 동안의 현장경험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겸사겸사 해서 의료계통, 가정상담 계통 기관에서 집중적인 활동을 했지요. 취직을 했지요.

 

그 당시 한국의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빨리 들어오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구요. 그리고 뉴욕에서의 생활이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온 세계가 정보, 문화, 연극, 음악 등이 모두 뉴욕을 통해 왔다 갔다 하면서 최고 수준의 기회가 제공되는 거예요. 또 그런 기회가 공짜예요. 센트럴파크 등에 여름에 가면 공연도 많았어요. . 발레 등등... 그렇게 재미있고, 재미있는 친구들과 사귀고 지내면서 생활했어요.

 

그렇지만, 63년에 미국에 갔는데, 68년 쯤 되니까, 이화대학의 김활란 총장께서 그때는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하여 은퇴를 하고 김옥길 씨가 총장이 되고, 김활란 총장은 뉴욕으로 왔어요. 그 분의 관심있는 부분은 종교였으므로, 원래 전공은 교육학이지만, 굉장히 종교적인 분이었어요. 그리고 미국 신학대학교에 공부하러 오셨었어요. 그래가지고 그 양반 때문에 왔다갔다 하는 도중에, 여러 가지 계기가 많았지만, 하여튼 나더러 이화 대학에 돌아와라. 학위를 해서 와라. 당신 자신을 위해 하지 말고 학교를 위해서 하라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나도 그 당시 9년째 뉴욕에서 놀았으니까, 그럼 그렇게 하겠다 해서 콜럼비아 사회사업대학에 가서 학위를 하고 73년에 돌아왔어요.

 

돌아왔더니 군사혁명의 과정은 계속 되고 있었고, 학생들 데모는 격해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가끔가다 정보원 사람들이 방에 들어와서 강의를 청취하고 말썽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고. 내가 직접 당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이 연구 등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상태였고, 가르치는 나로서도 강의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게다가 사회복지라는 것은 탁상공론으로는 안되는 거예요. 이런 기회에 나가서 사회복지의 현장을 광범위하게 알고 들어와야겠다고 해서, 국제연합아태경제사회이사회(UNESCAP, 이후 ESCAP)에서 오라고 해서 그곳에 가서 일을 시작했어요.

 

물론 그 전에 국내 초기 사회보장심의위원회라든가, 아동복지위원회, KDI의 사회보장제도를 위한 위원회 등이 있어서 여기저기 가서 활동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나 내 개인으로는 광범한 무엇을 쌓고 싶어 참여했어요.

 

그런데 나가 보았더니 ESCAP의 상황의 답답했어요. ESCAP에 가봤더니 모두 경제 전문가만 주도하고 있고 사회 복지, 사회 관련 전문가는 한명도 없었어요. 소시얼 디벨롭먼트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전부 경제학자들, 경제행정하는 사람 뿐인데, 사회복지 전문가로서 학위를 가진 사람은 내가 처음으로 섞였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사회적 생활의 질까지 향상이 된다는 가정하에서 경제발전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이었어요.

 

오히려 나는 오히려 둘이 똑같이 가던지, 어떤 단계에서는 인력의 질적 향상, 인적 자원이라 말하기도 싫고, 하여튼 사람들의 삶이 건강에서도, 양식, 인식의 면에서도 발달이 되어야 경제적 생산성도 늘어난다고 보았어요. 이런 이유에서 처음부터 통합개발이라는 것을 주장했었어요.

긴 이야기는 빼고 결론적으로 내가 9년을 있다 왔는데, 그동안 성취한 것인 통합 개발이라는 것이 국제연합정치회에서 뿌리를 매기는 것을 보고 왔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꽤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왜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냐 하면 예를 들면, 코펜하겐에서 열린 사회개발정상회의열린 회의의 아젠다가 무엇이었냐 하면 생산적 고용, 사회통합, 궁핍감소(빈곤감축)이었어요.

 

3개 아젠다의 시초가 ESCAP에서 내가 만든 ‘1990년대와 그 이후를 위한 아태지역 사회개발 전략이라는 프로젝트를 내가 만들었어요. 내가 만들어가지고 UNDP에서 자금을 따냈었는데, 그 프로젝트의 아젠다가 빈곤박멸, 분배정의(기회 포함), 전폭적인 민중의 참여를 통한 개발이었어요.

 

그런데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 UN본부에서는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었고, 정상회담 본부에서 사람들이 와서 프로젝트를 참석하고 나서 그 내용을 가지고 가서 정상회의의 아젠다로 삼았어요. 그러니까 아태지역에서는 아태지역대로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정상회담이 이루어진 후에는 그 정상회담 플랫폼 액션을 ESCAP의 플랜 오브 액션하고 융합시켜서 아직까지 하고 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내 개인적 상황 때문에 ESCAP에서 나왔어요.

 

그러나 출발점에서는 내가 공헌했고, 아젠다 시행과정에서 내가 두 번 정도 가서 시행과 관련된 내 페이퍼를 프리젠테이션하고 이나라 저나라 저 남태평양까지 가서 시행에 대한 단기 조언 등을 했었어요. 나로서는 할 만큼 하고 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내가 79년에 나갔다가 88년에 한국에 돌아왔어요. 그때까지도 한국의 상황은 그렇게 많이 진전이 안 되었더라구요. 미안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사회보장에 있어서도, 인구의 발생에 대한 대처에 대해서도 너무나 소극적이고, 빈곤퇴치, 고용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예요. 그래서 나는 정부 일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을 못했어요.

 

그 대신 그동안 ESCAP에서 용역이 들어와서 일을 계속 했고, 조금 후에서부터는 UNDP의 용역을 많이 해서, 우리나라가 IMF시절이 터졌을 때, UNDP, KDI와 협력해서 IMF로 인한 사회 요구와 대응책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페이퍼와 책을 냈었어요. 그리고 UNDPIMF상황과 관련된 우리나라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모으는데, 내가 수집해서 보내주어 많은 인정을 받았어요. UNDP 휴먼 디벨롭먼트 레포트에 내 자료들이 레퍼런스로 나와있고 그래요. 나는 레퍼런스를 내 이름으로 하지 않고 내가 만든 한국사회정보연구원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아무리 박보희로 찍어도 찾을 것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여성과 관련된 보고서, 우리나라가 UN에 제출한 여성차별철폐를 위한 협약이 있잖아요? 협약에 대한 이행사항을 5년마다 보고서를 내거든요? 보고서 초안을 내가 영문으로 작성하여 보내드렸고 했는데, 그런 것도 내 이름으로 하지 않아서 없어요. 그리고 여성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했지만, 주로 이야기하고 싶은 하나는 북경에서 있었던 1995년 베이징 여성대회 할 때 국내에서 준비를 하는데, 우리나라의 국제연합 가입시일이, 경력이 하도 짧았기 때문에 전혀 그것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정식으로 고문이 되지는 않았지만, 실무 국장을 많이 도와 해드렸고, UN본부에서 있는 여성 대회를 위한 전문가로서 참여하여 도움을 주었어요. 나중에 그런 공헌을 받아서 비추미 여성 대상을 내가 두 번째로 받았잖아요. 첫 번째로 이효재씨라고 사회학자로서 사회운동가 유명한 분 있잖아요? 그 양반 알아요 몰라요?.

 

여러분들! 사회사업하는 사람들의 단점이 무엇이냐 하면 광범한 사회인식이 부족해요. 사회사업, 열악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 도와주는 것은 열심히 하는데, 이 열악한 사람들이 왜 나왔는지에 대해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거시적 차원으로 해야 하는 일이 많은지 이에 대하여 관심이 적은 것이 내 고민이예요. 답답한 부분이예요. 특히 여성들이 그래요.

 

요새는 서울대학교 같은 곳에서는 사회정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꽤 있기 때문에 좀 나아졌는데, 여성들은 특히 사회치료에만 상담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나도 상담을 5년이나 했다구요. 가정상담도 하고 의료상담도 했어요. 내가 그 중요성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안되요. 그런 미시적인 클리니컬한 도움을 주려고 할 때에도 거시적인 연계상황을 알지 못하면, 효과를 올릴 수 없어요. 법적으로도 사회 행동을 하면은 이 가정이 살아날 수 있을지, 어떻게 정책을 바꿀 수 있을지 알아야 해요. 그런 것에 대하여 모르고 있어요. 사회액션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할 것예요.

 

소셜 액션은 사회사업의 중요한 수단, 방법론의 하나예요. 거기에 대해서는 관심들을 덜 가지는 것 같아요. 커뮤니티 올가나이제이션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나라에서 CO를 한 것은 굉장히 많은데, 실제로 막상 한 것은 사회복지사라기 보다는 종교가라든지, 시민단체 등이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CO 등의 방법이 지금도 타당한 사회변화 수단이라고 봅니다. 레벨은 달라졌지만, 지금 많이 사람들이 하고 있는 자활이라든가, 환경운동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사회액션, CO인데, 그런데 사회복지전문가들은 거기에 없어요. 답답하지 않아요? 그렇게 됨으로서 사회복지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소위 사회변화의 변두리에, 뒤따라가고 있어요. 내가 답답한 게 이거예요.

 

사회복지교육이 요새 커리큘럼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화대학이라든지 등을 보면 아직도 답답한 부분이 있더라구요. 성공회 등을 보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아주 완전히 달라져야 해요.

 

여성과 관련해서도 적은 것이 있는데, 여성의 문제도 여성의 문제라는 범위, 금을 그어서 접근해서는 안되요. 권익을 찾아야 한다는 차별을 받았으니 찾아야 겠지만, 사회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거예요. 힘이 있어야 해요. 힘이 있어야 여성의 권리를 제대로 찾을 수 있어요. 피해 받았으니 보상해 주세요라고 울기만 해서는 한계가 있어요. 우리나라, 세계적으로 그 한계를 넘어선지가 꽤 된다고 보는데,

 

그럼 뭘해야 하느냐, 그러면 여성이 사회변화 전체의 어떤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스스로 그렇게 함으로서 힘이 있어지고, 그렇게 함으로서 인정을 받고, 그렇게 하면 동등은 자연히 온다라고 봅니다. 여성운동도, 사회복지도 그렇고, 그런 것도 생각할 때 거시적인 진단력, 사회진단력 소시얼 다이어그노시스가 사회사업방법론의 시초거든요. 매릴 리치몬드 그책 읽어봤죠?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어요. 클리닉에서 아동의 내용을 진단하는 것이 아니예요. SD는 미시적으로 매크로적으로 다 거행되어야 하고, 이 상황의 연계성을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다이나믹한 어떤 사회현상이든, 거시적이든, 미시적 현상이든 다이나믹한 현상이라는 것을 추구하고 해답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요새 2년 동안은 전혀 활동을 못했어요. 수술을 두 번이나 했어요. 입원을 해서 사무실도 운영 못했지만, 몇 년전부터 우리나라의 고용문제 해결이예요. 왜 실업문제 해결이 안되느냐? IMF 터졌을 때 대안적 사회보장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등을 발표했었는데, 공공 녹색창업 프로젝트를 보건복지부에 시행했었는데, 공공근로 자금을 활용해서 참석자의 창업자금을 마련해 주고, 창업주가 기업주가 되어 스스로 운영함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하는 목표를 하는 프로젝트를 냈어요.

 

그런데 보건복지부에서 자금을 주긴 줬어요. 20억 신청해서 16억이 나왔는데, 연초에 나온 것이 아니라, 7월에 나왔어요. 정부자금이 매해 끊어지잖아요. 6개월동안 16억을 어떻게 써요? 원래 2년동안 쓸 생각이었는데, 내가 생각한 형태로 공공근로를 활용하려면 준비를 해야 해요. 장소, 자재 등을 마련하고, 시장조사를 마련해야 하느라, 3달은 준비해야 하고, 3달은 해야 하는데, 금액을 쓸 수 없었어요. 마침 지역사회복지관협회에서 돈을 달라고 하고, 가톨릭 자활하는 사람들도 만나서 3자로 모여 나누어 사업을 진행했어요. 3달동안 9000만원 이득이 났어요. 이것은 인건비는 공공근로였고, 잉여자금이고 이것은 창업자금으로 가질 것으로 알고 있었은데, 창업자금이 아니라 회수해 갔어요. 이렇게 되니까 판이 깨지고 만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실업을 없애려면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직장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해요. 공공근로는 6개월도 못해요. 기근만 면하는 상태로 두는 거예요. 내 창업 아이디어는 통로를 줄 수 있는 건데, 정부가 정책적으로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답답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IMF 시대는 위기상황이므로 위기에 맞는 임시변통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정부하고는 일을 할 생각이 없어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났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때 만든 프로젝트가 4개 있었는데, 저공해 식료품을 만들어서 배달하고 파는 만만사(맛맛사)가 그 때 시작해서 독립했어요. 아직도 있구요. 그때 이화대학 학생문화관이 있었는데, 샌드위치 등을 만들어서 납품했어요. 지금도 K? 사업하고 있더라구요. 마포사회복지관에 있어서 지금 잘하고 있어서 되었고,

또 하나는 미화사업 청소 사업을 했는데, 서울 YWCA가 건축되어서 청소사업을 경합해서 들어가서 아직까지 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재활, 옷 컴퓨터 재활관련해서 마포구 재활센터에서 아직하고 있고,

또 하나는 무공해 농업하는 것. 땅을 의정부에 야산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요. 야산 일부를 활용해서 심고, 가축도 키워서 팔고 해서 소득이 꽤 났어요.

의정부 것은 의정부시하고 같이 했는데, 의정부 시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잉여자금을 어린이 토종닭, 장어 등을 양로원 등에 분배해 주고 마는 것으로 끝나서 안하게 되었어요.

 

이런 것에 관심있어서 답답해 하고 있었는데, NHK 방송을 보다가 소시얼 인터프라이즈 사회적 기업에 대하여 알게 되었어요. 사회복지사협회에서 해외연수 가는 것 통해 영국의 사회적 기업 탐방을 했고, 그 후에 세미나도 하고 보고서고 내서 지금 노동부에서도 그렇고 정부에서도 관심이 많고, 한나라당, 열린우리당에서 사회적 기업 진흥을 위한 법안을 만들어서 계류시키고 있는데, 정국이 나빠서 처리 못하고 있어요. 나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몇 분에게 요청을 받아 법안을 만들고 공청회를 하기도 했는데, 이게 잘 되면 나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하고, 내가 한국사회적기업진흥회를 만들었는데, 얼마 있다 병이 나서 오랫동안 병으로 있어 그것도 진행을 못시키고 있어요.

 

내 관심사는 사회적 기업을 통해 우리나라 실업문제를 지속가능하게, 또 우리나라의 기업문화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초보단계로서 이 일을 성공시켜야 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앞으로의 경제라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것은 이대로는 있을 수 없어요.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본주의가 옛날에 존 바이브레이스라는 뉴 인더스트럭트 ? 사람이 사회적 책임을 다함으로서 공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기업도 계속 유지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시장없는 기업이 없고, 시장은 누가 구성합니까? 소비자가 힘이 없다면 시장이 유지가 되요?

 

나는 막스 주의자가 아니예요. 막스가 살아있다면 오늘날과 같은 연쇄 혁명적인 과학기술로 인해 사회가 변화된 것을 예상치 못했을 거예요. 자본주의가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시장을 세계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그러나 시장은 한정되어 있는거예요. 20세기 중반까지는 자본주의 내 기업윤리가 달라질 것이라고 봐요. 이를 누군가 촉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봐요. 그 수단의 하나가 바로 사회적 기업이라는 거예요.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책임이 있고, 생산성도 있고, 그런 기업을 찾아서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투자 그것이 노력이건, 자본이건 간에 투자를 스스로 지탱해 나가는 것이예요. 물론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제3자저인 투자도 할 수 이쏙, 공적인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고, 재래적인 기업이 참여할 수도 있는 거예요. 이러한 운동이 구라파에서 이미 활발하게 실행하고 있는 거예요. NHK에서 광범위하게 2회로 운영했는데, 영국, 아일랜드, 구라파 등에 가서 광범위하게 취재해서 제작했는데, 이 자료를 얻지 못했어요. HNK가 제작한 것이 아니라 외주 판권 때문에 얻지 못했어요. 앞으로 외주 자료를 얻어서 보여주면 좋겠어요. 앞으로 우리나라도 이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러분도 관심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바드대에서도 사회적 기업에 관하여 강좌를 정식으로 제공하고 있고, 런던에서도 여러 강좌를 개설하고, 다른 학교에서도 많이 개설하고 있어요.

 

여러분도 야심이 있고, 사회를 위해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내 직장, 내가 취직을 할 수 있을까 등에만 관심을 가지지 말고 좀더 장기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유학을 간다면 그런데 가면 좋겠어요. 런던에 가는 것 중의 하나가 스쿨 포 소시얼 엔터프라이즈라는 것이 있어요. 여기서는 개별적인 맞춤형 훈련을 집중적으로 하는데, SE프로젝트를 하나 가지고 가야 해요. 교수와 상담을 받아가면서 하는데, 교수는 한정되어 있지 않고, 그것과 관련된 최고 권위자를 연결시켜주어요. 그 때 단계별로 어떻게 성공시킬 것인가를 단계별로 공부해서 올 수 있어요. 좀 비싸지만, 최장 6개월이면 끝이 날 거예요.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이메일을 알려주시면 보내드릴께요. 그런데 가고 싶으면 추천서도 써줄 수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들도 해외연수를 지원해 줄 단체가 있다면 한번 가보세요. 복지관, 자활 중에서도 갔다온 사람이 있을 거예요. 관심을 가지세요.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현장에 있는 것은 사실인데, 하나는 사회적기업을 발전시키는 것, 또 하나는 내 나름대로의 연구과제가 있어요.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알게 될 거예요. 박사학위 논문을 저개발국가에서의 사회정책 형성 연구라는 것을 했었어요. 그 연구를 위해서 6나라를 살펴보았는데, 볼리비아, 스리랑카, 애굽, 리시우스, 가나, 타일랜드를 연구했는데, 이 나라들이 한국과 비슷한 경제수준의 나라였어요. 왜 한국을 넣지 않았느냐 하면 사회복지, 정책과 관련된 자료가 하나도 없어서 못했어요. 특히 영문자료는 특히 없엇어요. 그 때 논문으로 얻은 것은 사회정책 형성에 있어 정치역학적 패러다임인데, 내가 살핀 변수가 36개 정도 되었는데, 이를 규범화하면 내재적 요소로 제도, 사회요구, 자원 등 외부적 요소로 외국 자본시장의 영향이 있어요. 또 정치적 요소로 집권 집단의 정치이념, 지향성 등이 있고, 이에 대한 대치적 것으로 정치세력 요소로 노동조직, 시민단체 등 유효 정치세력이 있는데, 이 두 요소는 실존하는 사회요구와 실존하는 경제사회적 자원이 정책을 지향하는데 있어서, 정치집단과 정치세력의 상호 갈등, 상호 경합의 과정을 통해서 정책으로 낙착한다, 그런데 여기에 제도적인 내외적 요소가 작용한다는 다이나믹한 과정을 정책 형성 과정으로 찾았음.

한국의 상황에서 한번 검증하면서 수정을 해 보고 싶은 연구과제예요.

 

여기까지가 내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남대 오인비라고 합니다. 사회맥락 속에서 보여지는 사회복지사의 케어적인 역할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질문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일하시면서, 사회복지 환경이 가진 강점이 무엇이고, 강점을 살려서 저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어떻게 살리면 좋을지 여쭙습니다.

 

내가 거시적인 것에만 관심가진 것도 아니고, 미국에서도 상담활동 했다고 했지요. 그것도 잘 알아요.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의 연계성을 중요성을 착안해서 거시적으로 돌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거시적인 관점이 미시적인 관점에 적용안된 것은 아니고, ...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적인 현존하는 잠재하는 가능성 또 강점이 무엇이냐?

글쎄 우리나라가 아직도 정의 사회, 인정, 등이 거래되는 사회라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라고봐요. 우리나라의 제도도 대인간 사람 집단간 관계에 끈끈함으로 말미암아 좌우된다고 봅니다. 그것의 역기능도 많지요. 하지만, 그것이 뭘 좌우하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정의 사회라는 것을 어떻게 가능하면 순기능적으로 더 조련시킬 수 있을까 이런데 착안해야 한다고 todr가하고, 여러 가지 구상이라는 것이 그것의 바탕에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때 까지 해온 서구의 제도들이 한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케이스웍의 경우도 서구에서는 사회사업접근에 있어 가족의 문제가 있을 때 개인을 중심으로 해서 하는데...그런데 물론 여기에도 타당성이 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족이면 가족, PO그룹이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 우리나라의 PO 그룹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서양의 PO그룹이 경쟁적인 것으로 되었다면, 왜냐하면 거기서는 개인적인 경쟁이 굉장히 중요하니까, 우리나라에는 지금 그렇게 되가고 있어요. 그 이전에는 굉장히 뭉치는 힘이 강한, 그룹의 무엇을 위해 개인의 목숨도 바치는 그런...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폭력사회 아니겠어요? 폭력사회 들어간 사람은 목숨을 바치니까, 공포도 이유겠지만, 의리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이러한 것을 순기능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잠깐 폭력사회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하면, 폭력사회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주류사회가 폭력사회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요구를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알터너티브 스트럭쳐 조직, 체계 속에 들어가서 거기에 가치를 받아서 사는데 있어 삶의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이는 주류사회의 실패이다. 개인의 무엇도 인정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기회를 맞았다면 그런 사회에 들어가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해야 하는 사람의 수는 적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폭력사회는 막 늘어나잖아요? 이런 것도 우리나라 사회의 틀 역할을 하는 인간관계이 순기능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족치료에 대해서도 그렇고, 일본 청소년 치료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런 것이 감안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강점의 하나예요.

 

치료적인 개입이 어려운 것이 어떤 대인 관계를 통해서 누구를 변화시킨 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치료하는 사람에게도 힘들어요. 외국에서는 치료하는 사람도 치료를 받으면서 해요. 개별차원에서건, 집단차원에서건 받아가면서 해요.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사실 포기하기 싫어요. 잘못하면 번아웃도 되고/.. 하여튼 그것이 중요한 것의 하나고..

 

그것을 강점으로 일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고, 하나의 이완점. 중요한 이완점이라는 거예요.

 

또하나의 강점이라는 것은 시니컬한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위계사회예요. 굉장히 위계사회예요. 그래서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이 저절로 맑더라구요. 지금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윗물이 너무 흐려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나라 저전체가 완전히 공해가 된 것인데... 위계 질서는 아직도 있어요. 위계 질서를 이용할 수도 있다고 해요. 나는 위계사회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진정한 의미의 상호존중에 입각한 인본사회, 이를 민주주의라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떤 제도적 틀 안에서 어떤 요건을 충족하면 민주주의라 볼 수 있는 거거든요. 북쪽에서도 우리나라도 민주주의라고 말하죠. 그런데 실제로 민주화되었느냐 나는 이거 모르겠단 말이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을 존중하고 인간을 우선하는 그러한 인간존중을 바탕한 인간사회가 형성될 때까지는 그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위계사회의 특성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즐거움 좋아하고 동정심 많고... 그런데 동정심의 반로 방향이 유치원 차원에 있다는 것.. 곤란에 빠진 사람에 가서 기부하는 것은 알지만, 정말로 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방도를 알려주는 예를 들면 사회적 기업이라는든지 물론 그것만이 방도는 아니지만, 그런 것이 모자라는 것 같아요. 바깥분에게 핀잔주는 것의 하나가, 핵심분자의 하나인데.. 로타리라는 것이 뭐하는데냐? 돈 많은 사람들이 모여 파티하고 회의만 밤낮하고. 당신들이 힘을 모은다면 우리나라의 실업문제 당장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는 것이 뭐냐하면, 구세군, 고아원, 장애인 집단 데려다가 일년에 한번 기부하는 그런 상태거든요. 그래서 너무나 인식 부족이예요. 다행히 국제로타리 차원에서는 한가지 새로운 것을 했어요. 세계적으로 소아마비를 완전히 없앴다 해서 백신을 온 세계 백신을 배포하는 비용을 WHO와 협력해서 다 댔어요. 아직 소아마비가 다 퇴출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로타라의 그런 사업, 장학사업도 좋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로타리 장학금 이용해 보세요. 외국에 유학가는 장학금, 박사과정 지원하는 것도 있고 해요.

 

아동재단에 하는 것도 있고, 사랑의 리퀘스트도 있고, 재해 관련된 것도 있는데, 그것도 좋지만, 우리나라의 방법론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당신이 한번 강점을 얘기해 보십시요.

 

오인비 : 저는 가족이 끈끈하다는 것. 한국사람이 가진 정의감이라 생각합니다. 는 취지로 이야기함.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위험요소가 있다고 보는데..가족의 경우에 집단 이기주의의 일환으로 가족이기주의가 있고, 예를 들면 미국 비자 받으려면 얼마나 모멸적인 상황을 당하고 했는데.. 나만 가면 되니까, 자기만 받아서 가면 되니까, 자기 애들만 들어가면 되니까, 다른 애들은 상관없으니.. 돈 주고, 촌지주고 하는 것이 가족이기주의예요. 이것을 고쳐야 해요. 나와 내 가족과 타와 타 가족의 이해관계가 결국에는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불교의 신조가 그거 아니예요. 다 돌아온다. 자업자득이라는 것도 있고.. 난 불교는 아니지만, 어른들 얘기에 의하면... 그런 것 타당한 것 같아요. 모든 다 돌아요.

 

여러분 물은 바보를 알고 있다 라는 책 알고 있어요? 그것 굉장한 책이예요. 그사람이 그렇게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물이 결국엔 온 우주를 연결시키는 매체라고 봐요. 전기도 물이 없으면 전달이 안된다고 보거든요. 물과 전기가 우리 안에도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사문제, 이해문제 이런 것이 다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테두리를 긋기가 어렵고, 우리가 테두리를 긋는다면 그 순간을 위한 편의를 위해를 하는 거예요. 사회학적인 연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다 잘라서 국부적으로 하잖아요? 그것이 다라고 하면 큰일이예요. 우리는 할 수 없이 하는 거예요. 의사들이 인체를 연구할 때 할 수 없이 세포를 잘라서 연구하는 것 처럼... 어떤 점에서는 일부가 전체예요. 어떤 때는.. 연 모인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통하는 것이 우리 세상의 현상이예요. 도를 도로 이야기하면 도가 아니다. 노자이죠?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내가 학교에서 가르칠 때 가장 답답한 것이 뭐냐하면 가르친 그것을 정의를 해달라는 거예요. 의도가 뭐냐하면 정의를 외웠다가 시험 칠 때 착~ 내뱉고 싶은 거예요. 그것 참 답답한게 어디있어요. 현상이라는 것은 자꾸 움직이고 변하니, 현상을 따라가려 해야 하는데, 어떤 곳에 고정시켜서 알려고 하면 이미 실패예요. 그런 점에서 테두리를 지는 것에서의 위험성이 있고,

 

정의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예요. 나는 한국사람만 정의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한국사람이 정의감이 있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참아요. 그리고 참다가 폭발시켜요. 이것처럼 낭비적이고, 소비적인 것이 없다고 봐요. 독립사, 광주사건, 육이구 사건 등등... 우리 모두 폭발시키거든요. 그 때 그 때 항거하고 시민적으로 활동하듯 그 때 그 때 집고 넘어가자 말이예요. 그러면 그런 낭비도 없고, 울화가 쌓이지도 않고, 한이 쌓이지도 않는데.. 그러잖아요. 일본한테 먹힐 때도 그런데, 먹히고 나서 독립운동 했지만, 먹히기 전에 왜 힘을 못 썼지? 그것도 개인주의란 말이야. 공명심, 다른 것 생각안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관료들. 그런 결과로 그렇게 된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정신이 그것이 소비적이 아닌 방법으로 그 때 그 때 순리적으로 표현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정의심에 대해 자만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양원석

저는 앞으로 사회복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복지자치하고,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따른 지속가능한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려면 지역사회에 밀착되어진, 지역사회의 필요에 맞는, 자원을 연결하는 지역사회 마다의 역할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사회복지가 추구하는 바는 조금은 융통성 없이, 확장시키지 않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만을 세분화시켜 파고들어감으로서 이 사회의 복잡 다양한 것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내가 사회적 기업 등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회적기업이라는 것이 실업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지역의 바탕으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지역을 위한 생계 기획을 창업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예요.

 

그 외의 문제도 참여적 민주주의가 뭡니까? 그 지역에서 우러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지역이 주도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복지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지만, 복지관 뿐 아니라 다른 시민단체, 환경단체, 육아단체, 교육단체 등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중앙정부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고, 재원등도 중앙정부에 많이 있어서, 지방정부나 지역사회가 정부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있어요. 대신 그것에 대한 주도권이라든가 하는 것은 당사자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 해결책을 찾아내고, 그 사람들이 필요한 도움을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복지사가 도와주고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CO가 그거예요. 예를 들면 가족계획 협회 있었잖아요? 그 사람들이 처음에 가족계획을 장려하기 위해 했던 일 중 하나가, 지역에 소단위적으로 들어가서 그 지역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는 몇 사람을 골라 그 사람들과 협의를 시작하고, 또 사람들이 주가 되어 지역의 주부들이 동원이 되기까지 되었어요.

이렇게 팽창되면서 지역의 경제력까지 굉장히 확장되었고, 아주 보수적인 지도자인 할아버지까지도 아이를 봐주면서 며느리에게 나가서 하라고 장려할 수 있을 때 까지 사회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니까 누가 생각을 가질 수 있으면 하는데, 아마 우리의 경우에는 그 때와 지금은 다르기 때문에 자아의식 자신들의 상황 의식이 꽤 높아졌을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잠깐 누가 주도만 하면 시작이 될 수 도 있을 테지만, 그런 것이 없는 경우 또 그런 것이 있는 경우 효과적으로 가이드 하기 위해 사회복지사가 전문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육아의 문제든, 가정상담, 고용의 문제든 간에 하다못해 우물을 파는 문제라도 좋아요. 그런 것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 낸다고 하면 자립, 지역 자립 경제 사회 구조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 구조가 다 모여서 비로소 우리나라가 건전한 나라가 된다고 보는 거예요.

 

 

양원석

그런 점에서 사회복지가 하는 프로그램 실천을 보면, 그것이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영역이든 그것을 활용해서 할 수 있고 존재이유를 확보하고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복지는 지역사회와 유리되어 있으면서, 사회복지의 고정된 영역만 파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지역에서 가장 유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붙들고 보호하는 경향이 많지 않은가 싶은데,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놓여있으면 안되요. 사회복지관의 사업이 영세민, 영세자 위주로 한다면 그 사람들은 언제나 영세 상태에 놓여있을 수 밖에 없어요.

 

유니세프 대표부가 한국에 있을 때인데, 국내에 있는 아동보호 사회복지시설들의 역할 등에 대해서 한번 쭉 점검할 프로젝트를 내가 맡은 적이 있어요. 이대 대학원 학생들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시찰하고 와서 보고서를 썼는데, 그 중 주제 하나가 사회복지관의 지역사회를 위한 사업들이 첨단무엇을 이 사람들에게 주입시켜줄 수 있는 사업이라야 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에스캅으로 네팔 갔다와서 네팔 사람들, 그 나라 사람들의 기술 수준에 맞는 기술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내용에 대해서 나는 반대했어요. 그 사람들이 가뜩이나 떨어져 있는데 뒤진 기술을 가르쳐 주면 언제까지 뒤지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일 수록 첨단기술부터 가르쳐줘야 따라올 수 있는 거 거예요. 그 나라 사람들 모두가 바보가 아니거든요.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고, 공부는 안 했어도 머리 좋은 사람은 있을테니까요. 영세, 빈곤층이라 해도 모두 바보라 생각하고 우리가 시작하는 것은 큰 잘못이예요. 오히려 첨단 사업을 주어야 비로소 이 사람들이 주류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의 사업도 그래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의 복지관의 사업도 가능한한 그래야 하는 거예요.

 

 

양원석

그렇다면 복지에 대한 테두리는 없어야 하는 것이지요. 확장시켜야 하는 것이겠지요.

 

 

 

당연하지요. 물론이지요.

내가 테두리 없는 그것을 말했는데, 내가 이화여대 10주년 기념 무슨 특강을 맡아서 했는데... 사회복지사의 기능이라는 것을 획기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면 사회설계사라든, 사회기획사라든 뭐를 통합적으로 다이나믹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이름으로 바꾸고, 교육도 그런 차원에서 시행되어야 겠다는 차원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그 논문을 가지고 있어요. 왠만한건 다 버리지만,

 

그런 이야기하니까, 사회복지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신통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 사람들 자기 전문성을 굉장히 매달려 있거든요. 당신들도 그렇게 되지 말아요.

 

 

양원석

전문성을 잡고 있다는 것이 사회적 욕구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대안세력이 나오고...

 

 

 

대안세력이 나오고, 그 사람들이 전문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시행착오가 많이 생겨요. 시민단체 그 사람들이 문제제기는 많이 하는데, 대안이 없거든요. 실업문제, 양극화문제, 세대갈등에 대해서도 대안들이 없어요.

사회복지 전문영역이 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것에 대해서 해답을 제공하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상황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니까 사회복지의 개념을 광의의 개념으로 잡아야 해요. 사회복지사라 해서 클리닉, 임상만 하는 것이 사회복지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문제도 절실하게 되가고 있는데, 그게 다가 아니예요. 그러니까 사회복지사 개개인은 그렇다 해도, 사회복지계! 하나의 전문영역으로서는 생각틀을 굉장히 바꿔야 하는 것이지요. 벌써부터 역설하는 것인데, 별로 먹혀 들어가는 것 같지 않고.. 그래서 아주 외롭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경기대학교 신유식입니다.

선천적으로 어떤 능력이 있으셨는지,

후천적으로 어떻게 공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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