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영상/사회복지아카이브-역사기록

보람원 손용섭 원장님 인터뷰 원고

이감동 2011. 1. 3. 23:01

보람원 손용섭 원장님.hwp


◆ 보람원 손용섭 원장님(tape 1)



2214 내가 한거에 대해서 제일 잘 한거 잘 모른다. 남이 평가를 하면 했지 조그만 상 -야간학교 운영, 농촌지역사업, 그것이 국민들로부터 어필 받은 것, 내 나름대로도 그들이 편지 써서 보내온 편지 받은 것 감동을 준 것이라고 생각
최근에 형수가 신문에 난 것보고 칭찬, 그것도 야간학교 얘기였다. 그런 걸로 봐서 제일 좋은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2330 지원?
시도 입장에서 볼 때 달가운 것이 아니다 나는 편하게 얘기 하지만 장애인 시설 많다. 특히 음성꽃동네 충북의 사람만의 생활 터전 아니고 전국에서 온다 그러나 음성군, 충북에서 돈 다 된다. 눈에 가시일 수 있다. 사실 관계기관입장에서는 참 어렵다.

2450 정원은 한정되어 있고 시험 봤다. 중․고 1,2,3학년 있었기 때문에 중과정 1년 육개월 이고 고 1년 육개월 즉 3년에 6년을 마스터 많은 신경과 많은 시간이 걸리고, 100명 들어와도 20명 졸업하는 듯 쳐지는 사람 있고 졸업하기도 어렵웠다. 한동안 들어오기도 어려웠다.

2530 충북 교육감이 자활학교 왜 합니까?
첫째 비행청소년 미연에 방지, 선도. 의 큰 장점, 무슨애기요? 야간학교 오후 6시 10시 공부하는동안에는 절대로 사고 낼수 없다. 시간이 많고 할 일 없으니깐 사고내는 것이다.
그 시간에 모아서 공부 가르쳤기 때문에 큰 역할 했다.

2650 두 번재로 초 졸업못한 사람 많았다. 그때 당시
부모, 배움의 기회없어서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이 마음에 와 닿았다. 결과가 좋았다. 지금 은행, 교사, 청주 충주대에 다녔던 학생이 교사되었다. 교사 학생 정말 열심히했다. 한 주부는 자활학교와서 국문터득 검정고시, 졸업식 때 눈물 흘리는 모습보고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2850 농촌의 젊은이 없는데, 이농현상, 방지하는 방법 연구한 결과가 농촌지역개발사업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충북에 낙후된 농촌 3곳에 집중적으로 서비스, 물질적, 지역사회개발에 일익을 담당했다. 농촌으로 다시 찾아오는 현상이 생겼다. 청주근처에 흑염소, 한우를 사주었고 성공해서 다른 몇 군데 또 시작해서

3050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다리, 골목포장,. 특수안테나설치해서 돈 있는 사람들이 여러대 가지고있는 티브이를 가져다주고 농촌에 새바람 일으켰고 노인정, 어린이집운영. 한 참 바쁠 때 어린이들 마을회관에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도 해봤고
참 많이 했는데 지역에 어느 정도 인지는 몰라도 참 열심히 했었다. 82, 83년도 한국복지재단 부산지부장 겸직하면서 지역에 맞는 일 했다.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 가서 공중변소를 지역에 서너군데 지어주었고 어린이 놀이터
3200 경남 마산 현동 에 마을 회관 어린이 놀이터 지어 주었다. 짧은 기간 부산에서 일했지만 부산지역에 맞는 일 찾아서 해주었다.

3300 1996 한국복지재단 서울지부장 발령 받고 사표를 냈다. 검찰로 말하면 서울지검장 자리 누구나 가고싶어하는 자리

3330 가장 큰 이유? 부모형제 집이 서울이지만 1971년도 청주 발령받아와서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지역주민의 협조가 많이 있었다.

3359 특히, 1988년도 사무실 없을 때 모금해서 집을 지었다. 지역사회주민들로부터 모금해서 168평짜리 지하1층 지상 2층

3424 충북은 상당히 배타적인 지역이다. 타지사람이 모금했다는 자체가 없었던 일이고 지역주민에게 사랑받았다는 고마움 때문에 지역 배신하고 여건 좋은 서울로 가는 일이 양심적으로 허용 안되었다.
 
3450 둘째 이 지역에 와서 큰아들 작은아들 낳았다. 결혼해서 손자까지 낳고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이 지역에 터전을 잡아놓아서 가기 어려웠다. 몸만 가면되었었다. 그러나 지역주민과의 인간관계가 선 듯 갈 수 없었다. 지역주민과의 관계․협조가 좀 이루어졌는데 후임자가 앞으로 지역에 어려움을 주지 않았겠는가 생각되었고, 배은망덕하다는 생각 들어서 포기

3600 장애인과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8년 동안 일하고 있는데 현시점에 충실하고 있다.

3610 중앙대학교 사회사업학교 1회 졸업 1967년 졸업, 군대 갔다와서 바로 온 곳이 여기다.후회없고 자타가 공인하는 만큼 했다는 생각든다. 지역주님들에게 고맙게 여기고 있고 배타적인데 지역주민들에게 모금해서 집 지을 수 있었던 것 참 고마운 일이고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충북에서 살게 한 하나의 원인

3750 고향어디오? 청주라고 한다. 누가물어봐도 청주라고 하지,

3840 부산갔을 때 관계하면서 특히 부산일보 지부장과 얘기할 때 고향 어디오할 때 청주라고 했다. 그러니 최소한 지부장은 부산사람이어야한다고 했다. 직원으로 와도 좋지만 지부장은 안된다고 했다. 2년 있는 동안 극복하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충북으로 재발령받아서 올 때 부산에서 감사패 받고 왔다.

3920 부산, 경남에서 많은 일했다.

3950 첨 가서 무슨 행사할 때 높은 사람 모실려고 하면 밑의 사람이 방해를 많이 했다. 부산첨가서 현판식 할 때 가정복지과장이 부산 시장 못오게 방해햇지만, 2년동안 부산에서 무사히 일을 마치고 여기로 다시왔다.

4110 (원장님이) 자네들 왜 여기왔나?

4150 평소의 소신?

4200 저는요 가훈, 마음에 항상 가진 것이 ‘참다운봉사 웃음띤 대화‘, 신념이기도 하다.

4220 양심의 거리낌없다. 40년 일하면서, 매년 한국복지재단 인서비스 트레이닝하는데, 재단에서 표어 모집에 ‘참다운봉사는 웃음띤 대화로’ 세미나장에 표어 붙어있었고 상받음
앞으로도 할 것이고 지금껏해왔다. 우리아이들한테도 일깨우는 것이 웃음 띤대화 ,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

4320 사람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라, 같은 인격체로 대해야지 위치가 좋다고 밑에사람에게 손지검해서 사기를 떨어떠리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4350 언젠가 대구사회복지협의회 주관 대구 경북 400분 사회복지사 모아놓고 강의할 때 지금과 같은 애기하면서

4410 남들이 볼때는 가장 아래쪽에서 가장 아래쪽을 보고 일을 한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우리도 위쪽에서 위를 보고하자고 애기했고 맨 아랫사람에게 친절하게 하고 믿고 의지하게 따르게 할수있게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무원이야기를 했었다. 사회복지전담공무원하고 관계 돈독히 해라고 했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보사국장 하시던 분이 퇴직하고 서울 영등포 어디에서 일을 보는데 어떤 여자분이 친절하게 일을 해줘서 직함 물어보니 사회복지전문요원이었다고 했다. 퇴직한 그분 몰랐는데 ‘어쩐지’ 역시 사회복지하는 사람은 다르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울 수 있도록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4620 의사, 약사 ‘사‘ 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하고 인정을 받게끔하는 것이 올은 것이지, 의사 약사는 바로되는 것이 아니고 시험보고 된다. 우리는 그냥 되었지만 자격증 따는 것이 바람직하다. 떳떳하고

4720 사회복지한 사람은 일반 공무원과 같다면,,, 뭐가달라도 달라야한다. 사회복지사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 많이 느낀다. 지금껏 많은 일 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사회복지사가 캠프를 할 때 체육대회할 때 많은 프로그램하면서 대부분이 자원 봉사 활용한다. 사회복지학과 학생을 자봉으로 쓰는 것하고 타학과 자봉쓰는거 엄청난 차이 난다.  직접 자원봉사자 활용해복지 않고는 모를 것이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는 것이 몸에 베서도 그렇겠지만 확실히 다르다.

4900 자원봉사자 꾸중도 하지만 자원봉사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출발에서 해산할 때까지 자봉이 일다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캠프 정리 텐트 다걷고 마지막까지 해줘야 하는데 사회복지사는 마지막처리까지 해줘야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아는 것부터 사회복지한사람하고 안한사람 다르다. 그런데서 우선 차이가 난다.

5020 공무원들하고 가까이 해라, 전담 공무원 없을 때는 모르겠는데 있을 때는 공무원하고 협력이 지역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현재 사회복지전담공무원, 사회복지사들이 동사무소에서 상당히 인정받고 있다고 여겨진다. 흐뭇했었다.
선배의 역할, 후배의 역할 잘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맙게 여겨진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이 외원기관- 홀트, USC, CCF있는데 외원기관만 갈려고 했다. 바람직 한 것 아닌데, 공무원쪽으로 가라고 그때 당시 역설을 많이 했었다. 너무 편하고 돈에만 얽메이지 말고 긴 안목으로 봐줬으면 좋겟다고 애기 했었다.

5320 후배님들 잘하고 있다. 그때랑 지금이랑 시대에 따른 프로그램하고 있다. 그때당시 빈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절대빈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고 지금은 더 어려운 상대적 빈곤이 큰 문제다.

5410 삼디현상의 일에서 많이 일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좋은 것, 편한것만 찾는다 일하다보면 편해지고 좋아지는 것이다

5440 옛날 어른말씀 틀린 것 없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저는 고생을 사서했었다. 청주에서 초창기 근무할 때 나도 고향가고 싶지만 직원들 고향 다 내려보내고 사무실 지켰었다. 얼마나 좋은 지 모르낟. 갔다와서 직원드링 고마워 하는 직원들 보면 , 남을 도와보지 않은 사람은 남을 도와주는 그 즐거움 모르다. 자기 희생을 하면 한 만큼 돌아온다.

5600 삼디 일 몸에 베면 쉽다. 그게 더 쉽다.

5620 후배님들 좀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도 찾아서 해주시길

5640 언제가 로타리클럽 회장 때 인사말에 삼디, 남이 하기싫어하는 일찾아서 해보고 싶다고 말 한적 있다. 그렇게 했고, 할려고 노력했었다. 역대 회장들이 이루어놓은 것 제조명해봤고 왜 어려운일은 어려운지 찾아서 해 봤고 내 다음의 회장이 역대 회장이 한일 통계로 발표할 때 내가 회장일 때 가장 많은 봉사사업 했다고 평가받았엇다. 자기사 사회복지한다면 마음을 가지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5750 한우물을 파라!!! 자꾸 옮기게 되면 자기나름대로의 혼선을 빚을 수있다. 한 직장에 있게되면 대리과장 부장 관장이 되는데. 여기저기 좋은 데로 옮기면 소신 것 일할 수 있는 능력 결여가 생기고 그렇게 일하면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알아주기 바라는 것 아니지만, 결코 바람직 하지않다. 한 우물을 파라. 다른사람보다 뒤지게된다.

5950 혼자만의 생각하지 말고 옆의 동료와 같이 생각해라 동료 위사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뜻을 모아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1: 00: 22 실천 옮기기 어렵다. 후배님들 다 잘 하고 있지만 

0002 상고졸업후 중앙대 사회사업학과 들어가서 제가 과연 졸업을 할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이분야에서 끝까지 할수 있을까 생각했어싿. 입학해서 잠깐
고아원원장될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 1년 들었었다.

0050 아 이게 내가 갈길이구나 생각했었다.
1005 노는 것이 더 좋은 적 있었다. 자취하면 수업빼먹고 한 적도 있다.
0130 원래 끈기가 있는 사라미앋. 한국복지개잔 26년 개근했다.
0140 대학이라는 곳이 이런대구나라는 것을 알고 개근상을 받지안았다. 수업 안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햇었다. 수업재밌게 햇지만 성공적인 대학생활이라고생각하지 않는다. 겨우졸업했어삳. 졸얼후 바로 취직후 누구보다도 뒤지지않고 앞섰다.
0250 학교는 시학점 직장생활은 에이학점이라고 말 할수 있고 열심히 했다. 첨이중요하지만 끝도중요하다.
0303 학교에서 학교1등이 사회1등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학교 사회생활 다열심히 해야 한지만 저같이 공부안하는 사람들의 변명이라고생각하지만  사실 학교생활 일등이 사회생활일등아니고 학교생활뒤졌다고 사회나와서 뒤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0406 그래서 학교생활, 사회생활 열심히 하면 인정받고 지역사회에 그만큼 이바지할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0415 그래서 학교 때  즐거웠고 친구많았고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0430 철학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0440 학교 때,친구가 많았다. 집에 운동기구 많았고, 싸움도 많이 했고 하여간 어머니가 저한테, 그리고 산에도 많이 다녔다 거의 산에서 살았다. 수 토, 수업 없을 때는
0530  고등학교때 우리 집이 집합장소였다. 싸움도 하고 그래서 어머니가 1년은 먼저돌아가지 않았나 생각도 하지만

0600 그런 친구들 중에서도 수습을 같이하고 말리는 입장이었지 내가 앞장서서 싸움을 청하고 하지는 않았다. 내 천성이 사회복지쪽하고 맞지않았나 생각이
0620 퇴학처분도 받았지만 결국 졸업했다. 이유는 선생님이 그 나름대로 반성문써오라고했지 저한테는 그랬다, 꾸중듣지만 학교는 안빠졌다. 아파도 학교가고봤지 안빠졌다.

0730 일찍 철이들었다. 어머니게서 너만 말썽안부리면 잘 살겟다는 말한뒤 철이 들어서

0809 그때 자기반성하고 사회사업학과 들어와서 내가 갈길이란는 것을 빨리 찾았다. 군대후 시시에프에 들어와서, 35~6년 사회복지기관에서만 일했고 도움이 꼭 필요한 사라들과만 일했고 시시에프후 바로 로타리 그룹생활했는데 가장 어려운사라들하고만 생활했고 로타리 생활은 아주 극대극 사람들하고 생활했다. 지금도 국제적 봉사클럽에서 일많이 하고 있지만
어린이 재단에서 가장어려운 아이들, 모자세대, 장애인들하고만 생활했다.
인터부할때도 가장 쉽게 물어보고 이것이 버릇이 되어 로타리 그룸에서도 그렇게 말을 하면 이해못하는 사람들,,,
1037 사회복지일하면서 어머니께서 걱정 많이 하셨는데 대3 철들어서 마음 고쳐먹고 고등학교때 빗나갔으면 어떻게 되엇겠나
1150 아들들도 아빠체면으로 나쁜길로 빠지지않았다.

1245 대학시절보다 더 열심히 했을 것 같은데....

1304 대학졸업후 여기 들어왔을 때 청주에 처음 발령받아왔을 때 군대 갔다와서 취직하니 동창이 실장이 었다. 불편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일 못한다. 사적으로는 ‘야’라고하고 공적인 일에서는 실장로 대한다. 공과 사를 혼동해 본 일이없다라는 말 들었다.

1450 나이가지고 사회생활하는 것 아니다. 사회생활은 나이하고 관계없다. 나이먹으면 더 잘
해야지,,,,, 동료는 내 머리에서 사라졌고 현실에 입각해서 일 해싿.

1550  나는 수학적인 사고가 상당히 빠르다. 후원금 잔고 정리하는 것 큰 일인데 250사례 1시간도 안되서 다 처리한다. 그러나 다른 직원은 주판과 검산까지 이틀은 걸려서 한다.

1710 그 친구도 같은 동료 따라가기 위해서 노는 날도 일하는 것 대단하다.
1730 그친구는 머리가 둔해서 친구따라가기위해서 한 거고 나는 우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라는 의미로 일한 것이다.
1750 남을 배려했다. 지금도 그렇다. 직원, 가족한테도 우선먼저, 직원들 먼저 내보내고 문닫고 나가지, 턱나가고 문닥고 나오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잘하고 남이 잘하기를 바래야지
1822 벼가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높은 사람한데 건방을 떨지만가끔 나보다 조금 못한사람에게 나름대로 최선다한다. 양육강식 안한다. 정반대로 생활한다. 좋은 전법은 아니지만 그것이 결국 이기는 길이다.
1906 요새 정치인들 구속되는데 남돈 얻어먹을때는 좋지만 결국 패가망식한다.
1920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 또 한가지 정직해라라고강조한다. 손벌리지말고 손벌리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한다.
1940 누가 물었다. 재산 얼마나 모아놓았습니까? 부그럽지만 30년일하고 퇴직금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게 맞다. 있다면 능력이 아주 뛰어나거나 부정한거다. 일억이천 딱 집값이다 퇴직금이. 그전에 전세살았다.

2030 국제 로타리클럽등 엄청나게 돈들어가지만 회비 12만원 부대비용 300만원이지만 돈 잘냈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하는냐에 달린 것이다. 자기희생으로 돈을 낸것인데 
2120 내희생으로 내가 돈번걸로 돈내는데 우리직장에 어떻게득을 됬는냐?
일년에 내 희생으로 300만원 내면, 재단에 3.5톤 트럭, 재작년에 콤베아 벨트 11메다짜리, 컴퓨터실, 봉고차 하나, 제가 회비내고 로타리클러생활열심히하면서 다 얻어왓돠 장학금도 주었다.
2240 사실 재단에서 회비되어야하는데 안그랬고 내가 원하지도 않는다. 내가 희생한 만큼 득이 있는 것이다.  

2310 선생님 공부하실때랑 현재 다른 것 같은데 다시 대학생활 하신다면 어떻게 공부하고싶으신지 다시 사회복지전공하소싶은지?

2340 아빠 사횝고지다시하까요 32살 인데, 아들이.
2414 저는 지금다시 태어나서 대학들어간다면 사회복지할 것 같다. 자기일에 만족하는 사람 많지 안지만 다시 전공하고싶다. 저는 가정, 청소년, 장애인엣 일다했다. 비행청소년들하고 상당히 오래 상담했는데 표창도 받고 자활학교 야간운영, 지역개발사업 등 했는데 그냥 한 것이 아니고, 직장이라는 것이 가만히 있어도 돈주는 데 그러면 안된다. 나는 일 만들어서 일했다. 주위사람들 귀찮게 하느냐 하지만

2620 내가 바쁘면 주위사람들이 편해진다. 제가 바쁜만큼 어려운 사람에게 득이된다. 후원자하나라도더 개발하면 더 도움된다.
2700 많이 활동한 만큼 들어오는 것이많다. 로타리 클럽 회장때만 회원일 때 달랐다. 노역을 한 만큼 댓가가 있다.

2800 노인쪽 못해서, 잘모른다.
내 친구가 장애인 대부 소리듣지만 노인쪽으로 다시 일하는데 나도 그러고 싶다.
다시 대학생활 한다면 사회복지전공하되 노인, 현재 장애인하지만 얼마되지않아서 장애인 쪽으로 다시 하고싶다.

2850 대학생들에게 이런식으로공부해라, 권고말씀?

2900 빨리 생각을 해야한다. 사회사업하고 밖에가서 기관 방문 등을 하면서 대학교 3때 철이 났는데(그 말은 공부뿐만아니라 )그것이 1학년때 철이드느냐 3학년때 철드는 것에따라 달라진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하라. 1학년을 기점으로 아니거든 과감하게 결정해라 한눈팔지 말고 1학년넘어가면 어렵다. 나의 진로에 대해서 대학 1년을 넘기지 말아라
3030 아니면 2학년때 전과하던지 2 3 학년 적당히 넘어가면 그 분야에서 뒤지게 된다 이것이 갈길이라면 한눈팔지말고 전진하라

저는 한눈팔지 않았다.

3110 1981년도 부산발령받았을 때 고민했다. 부산으로 갔는데 2년만에 다시왔다. 한우물 파라와 같은 맥락,,, 계속부산에 있었다면 다양한 결과가 1년 넘지 않는 한도내에서  대학교 1학년때 빨리 진로 선택하고 아니면 전과하고 정진해라

3240 서울대 중대 이대 밖에 없었다 졸업후 10년 있다가 대학 다 생겼다. 현재는 250개대학,
청주대 사회복지과있는데 아주열심히 한다. 직원들 청주대 많다.
중앙대 후배들이 불많스러워하는데 청주 있을 때 살게되면서 반드시 청주대 학생 추천했다. 청주에서 살면서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지역에대한 마인드가있다. 외지사람들은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쌍방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직원뽑을 때 청주 사람 추천한다.
복수 추천안한다. 떨어진 사람입장에서 볼 때 결코 바람직 하지 않다. 2명중 1명 떨어지는 것 150명중 149명 되는 것다르다. 상당히 오fot동안 떨어진 사람 악감정을 가질 것이다. 
이것도 배려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3700 직장생활, 사회생활 같다. 배려할 줄 모른다. 참 쉬원것인데 안한다. 나의 배려심은 고등학교대 경험때문인 것 같다. 몸에 베면 젤 편하다. 기분상당히 좋다. 남을 도울줄 모르면 그 즐거움 모르다.

3850 남을 도와보라고 해보고 싶다. 얼마나 즐거운가 여운이 참 오래간다. 아주 기분좋다.
3930 한국복지재단에서 작년, 재작년에, ‘단비’라는 책자에 ‘설날과 세배돈’이라는 글 실었는데 후원자인 군인 소령이 나의 사진보고 새벽 5시에 전화를 해서, 잘 때였는데 첫마디가 ‘선생님 저 준회에요... 제가 1970년대 선생님으로부터 장학금 받고 공부한 준회에요,,,’

4128 그렇게 반가울수 없었다. 어쩐일인가하니 ‘어제 책펴는 순간 선생님 사진보고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 편지를 복지재단에 보내니 다음 호에 후원자의 편지로 다시 실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고 3까지 도와준 아이가 그 사진을 보고 30년이 자나서 백발이 된 나를 다 알아봤다.
편지의 내용이 ‘선생님 계급 정령이 되서 군대생활그만둘때를 대비해서 제가 선생님과같은 분이되기위해서야간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대학을 다니고 있습니다. ’

4240 이만큼 복사해서 다니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삼사관학교가서 군대생활하면서 자기 부대원에게 계속 설득해서 후원자를 만들고 정령 후 나와같은 사람이 되기위해서 대학다닌다는 것은 눈물날 정도로 감탄했다. 대단한 일이다.

4330 극적으로 작년에 만났다. 한복 행사때 만났다. 결환해서 아이도있고 끌어안고 고맙다하는데 참 반가왔고 그게 즐거움이다. 정성껏도왔기 때문에 그랬지 적당히 했다면 기억도 없었을 것이다.

4400그래서 남을 돕는 즐거움, 그러나 즐거움을 느끼기 우해서 돕는 것은 아니다. 도와주다보면 즐거움 오는 것, 언제 어떤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 도와주라

4440 부부맹인, 6남매, 집이 헐려서, 판자집에 그러고있는데 시장을 찾아가서 내가 책임질테니 육개월만 시간달라고 했다. 그러나 긴급자금, 독지가의 도움으로 방을 얻어서 내보냈다. 시청에 가서 시휴지 좀 달라고 해서 집을 지어주엇다. 우선 비 안맞게 그러고 나서 결연시켜서 돈 적금들어 도배도 하고

4740 남의 땅에 맹인부부가 집을 두채지어 전세를 주고 했다. 사고치면 도와주고 일하게 끔 만들어주고 그 아이들 지금은 2명이 은행도 다니고 지금은 과장이 아니라 나보다 더 잘산다.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른다.
4900 30년 회상해보면 지금은 못하죠, 아 나보다 열심히 한사람있을까 이런 마음 스스로 갖게끔 했었다.
4920 젊음 친구들에게 이게 지금 일하는 거니? 아니야 나는 그렇게 안했어, 누구는 일하는데 누구는 놀아 이렇게 생각안 햇다. 너는 쉬어 나는학께 했엇다. 제도 안하는데 k도안해 한다. 산이 몇 천평인데 휴지 줍고 풀뽑는 직원 없다. 시키면 좋아하지 않는다.  풀 뽑는 거 안시킨다. 원장이 하는거 보고 뽑겠지하고 계속 기대하는거지,  괸히 뽑았다 생가해본적 업었다.

작성일 : 2004/02/06 19:29 (2004/03/25 08:20)